진실 그리고 그 외의 것들
사람들은 제일 중요한 것을 잃으면, 그 것을 대처할 것을 찾아 받들어 모신다.
진리는 오로지 하나이며 둘이 될 수없다, 다시 얘기하자면 모든 것이 진리여서, 그 외에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고 한다면 틀렸다.
정말로 진리가 하나라면 그 외의 것은, 아무리 진리에 가깝다 하더라도, 그 것은 허상이고, 가짜이고, 거짓이다.
사실, 그 것은 진리라는 이름도 붙일 수없다. 왜냐하면, 이름은 그저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 이름은 고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변할 수 있고, 이름은 있는 것은 언제나, 그 것과 같이하는, 혹은, 반대되는 것과 함께한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이 것, 하나를 찾는다면 그 즉시, 모든 일이 해결된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생각 이전에 항상 이 것을 먼저 쓰기 때문에 생각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이 하나의 진실에 닿을 수 없는 두번째이므로, 선의 입장에선, 모든 생각은 틀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어쩔 수없이 생각을 이용해, 최대한 이 것을 설명하려 노력하는 것 뿐이고 혹여,
이 글을 통해서 자기 스스로, 찾아내기를 바랄 뿐이다.
불교의 본질은 “깨달음”이고 지금 어느 불교사원에서든, 깨달음 이 외의 것을 중요시 여기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마치, 극장에서 ”부처의 깨달음”이라는 영화를 상영한다고 속이고 “좀비영화”를 상영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본질인 깨달음이 잃었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랑, 믿음, 평화 등을 역설하는 것인데, 그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히려 본질에서, 더욱 더 밀어내는, 역활을 한다.
사람,믿음, 평화가 중요하다거나, 그렇지 않다라는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하나의 진실을 찾는다면, 그 외의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되거나 이미 진실 안에 녹아져 있는 것이다.
마치 그리운 사람의 모습을 눈,코,입을 부분별로 떼어내서 그리워 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본질을 잃는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코끼리의 모습이 몹시 궁금한 장님이 코끼리의 부분, 부분을 각각 만져 보는 것과 같다.
만약 기적과도 같이 눈을 뜨게되서 단 한번이라도, 코끼리의 전체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제일 좋은 방법이고, 그렇게 말도 안되는 체험이 밝은 대낮처럼 모든 것이 명백해지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 것은 폭포수처럼 올 수도 있고, 가랑비처럼 내릴 수도 있으며, 지나가는 여우비처럼 아주 살짝 지나쳐갈 수도 있겠으나, 그 경험은 당신의 중심을 바꾸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진리의 일부분을 보고 나의 것 혹은 나의 지식으로 삼아, 똑똑한 사람으로 만족하는 바보가 되지 말라.
나 하나를 버리면, 세상을 얻는다. 그러니 그 외의 것들에 욕심내지 말고, 먼저 나를 찾아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