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디 있어요?
“지금 어디 있어요?” 라는 질문은 화려한 언변이나 해박한 지식이 없어도 그 질문이 직관적이라면 어느 누구나 대답할 수있는 것이다.
이런 질문은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겠지만, “내가 어디있어요?” 또는 ”내가 누구에요?” 이런 종류의 질문이다.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해 부처님이 40여년간 한결같이 하나의 답안을 여러가지 도구로 알려주신 것이다.
그것을 가르키는 사람의 입장이 되보면, 너무 간단한 것을, 가리키는 것에 대한 난해함을 알수 있을 것이다.
가장빠르고 명확한 방법은 직접적으로 바로 가리키며“이것이다!” 하고 가리켜 주는 것이다,
듣는 사람의 본인의 생각을 거치지 않고, 가리키는 것만 바로 본다면 단번에 게임 끝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매우 드물고 가리키고 있는 모든 상황을 이해하려고 두뇌를 총 동원 한다면 이미 틀렸다.
마치 낯선이에게도 함박웃음을 보내고, 또 그가 주는 것을 선입견없이 바로 입으로 가져가는 갓난아이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진실에 바로 통하기는 힘들것이다.
이 것은 우리만의 잘못이 아니다,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그것을 빠른 시간내에 분석하고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득인가에 치중 해왔던,
우리 교육의 폐해지만, 어쩌면 그것은 뇌를 가진 모든 인류의 장애 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첫번째 가리킴에 곧 바로 통해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 일을 갈망해 왔다거나, 여러가지 수행으로 지쳐 더이상 생각하려는 힘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부처님은 6년 고행끝에 깨달음의 결실을 본것이 아니였고 오히려 모든 수행을 포기하고 내려 놓았을때 새벽별의 반짝임에 문득 시작을 알 수없는 오래 전부터 이미 있던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유는 나를 찾는데 지식이며 똑똑함이 왜 필요하고 거기에 생각이 왜 필요한가?
내가 아닌것을 찾을 땐 지금의 나도 “머리”라는 것을 쓴다. 왜냐면 그것은 이 몸을 쓰면서 부터 장착되어있던 옵션이다, 그러나 나 스스로의 진정한 나는 돌이켜 볼 대상이 아니다.
진실을 바로 가리켜도 여러가지 생각으로 꽉 차있어 가르키는 사람의 의도를 이리저리로 파해치며, 똑똑한 머리로 분석하면서 “저놈이 이런저런 말로 현혹시키면서 돈이나 요구하는 거 아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최고의 방법인 선의 바로 가리킴을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지금까지 그 들의 뇌 속에 스며든 고정관념들을 녹여내는 지루하고도 복잡한 작업을 그들이 좋아하는 대화로 시도한다.
내가 그동안 지식으로 배운 글이나 말이 효용 가치가 없는 일이고, 깨달음이 결국 “내가 누구인가?”하는 정말 간단한 문제임을 바로 볼 때, 추호의 망설임 없이, 사자와 같은 큰소리로 크게 때려서 네가 누구임을 바로 보여주는 선승의 크나큰 자비로움에 통할 수 있을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훌륭한 선승의 사원은 가난하다고 했는데, 이 말에는 두가지 해석이 있는데, 진실된 이 것 하나로 충분하다는 의미도 있고, 또 이 것은 돈으로 팔고 살 수있는 물건이 아니기때문이다.
먼저 깨어난 자의 날카로운 고함과 큰 한방을 받아낼 각오가 되어 있는자는 오라!
이 것은 돈받고 팔 수있는 물건이 아니지만, 이 세상에 어떠한 것을 주어도 살 수가 없고,
이 것은 공기나 햇빛처럼 흔한 것이지만, 이 것이 없으면 내 생명도 없다.
그래도 내입에 들어가는 밥을 걱정하고 내일 입을 옷이나 자동차를 걱정하고 잠들면 사라질 대 저택을 바라며 이 일을 끝내지 않고, 오지도 않을 먼 훗날로 미루겠는가?
다시한번 첫 질문을 상기해보라, 질문하는 사람도 답하는 사람도 모두 넌센스가 아닌가?
어디 있긴 어디 있어? 대답하기 그전부터 있던 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