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전단지
이제는 지식을 토대로 뭔가를 얘기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불편한 것이 되버렸다,
왜냐하면 그 뒤에 따라오는 질문들은 내가 언제나 가리키고 있는 우리의 본성과는 점 점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벌써 많은 날을 수 없이 많은 얘기를 하고 있지만,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시작도 못했다.
설령 내가 아무리 깔끔한 단어를 사용해서, 글을 쓰고 훌륭한 선사나 부처님의 말을 인용하고
한다 할지라도 길거리에 광고 전단지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피자의 광고전단지를 아무리 먹음직스럽다 하더라도 그 전단지를 먹을 순없다,
또한 피자를 모르는 사람이 그 전단지를 봤을때, 맛있어 보인다던지, 혹은 맛이 없어 보인다고
하는 선입견을 심어 줄수 있다.
그래서 예전에 선사들은 신심을 가지고, 수소문해서 찾아오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보여주고,
가리킬 수있었다.
어쨌든, 광고는 언제나 약간의 과장을 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제작자가 진실에 가깝게 만든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그들의 방식으로 보기 때문에, 왜곡되어 보일 수밖에 없어서, 광고 보다 제품이 훨씬
더 좋을 수도, 혹은 나쁠 수도 있다.
또한 제품의 본질이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광고에 돈을 많이 투자하면 제품이 더 훌륭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선사들은 더욱 더 이것에 대해서, 혹은 깨달음에 대해서 되도록이면 말을 아낀 것이다.
왜나면 우리의 본질은 이렇게 또는 저렇게 표현 될 수있는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또 보잘 것 없다면 한없이 보잘 것 없고, 훌륭하다면 세상에 비교할바 없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광고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더욱 더 광고에 중독 되어가고 여러 가지 피자 광고를 보고 여기 저기에서
피자를 주문하고 먹어보고, 여러 가지 책들을 주문하고 또 다른 깨달음에 관한 책을 주문한다.
아무리 맛없는 피자라도 몇일을 굶었다면 그 것은 내 생의 최고의 피자가 될 수있고, 진심으로 진리에
목마르다면 어떤 책을 읽던 설령 그 것이 전화번호부 책이라도 첫번째 페이지의 인쇄된 잉크 냄새만
맡아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광고의 궁극적인 목표는 실제의 제품을 만나게 하는 것이고, 소비자 역시도 목마름에, 배고픔에 오랜동안 진실로 그 제품을 실제로 만나는 것을 원했다면, 제품의 포장을 뜯기도 전에, 선사가 법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이 하나의 진실을 맞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배고플때 오로지 배고프고 목마를때 오로지 목마를 수 있다면 그 걸로 충분하다, 거기에서 버티고
그 불편함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초인종이 울리고 잘생긴 피자 배달원이 피자를 건네 줄 것이고, 그 것을 한 입 물때, 당신은
부처님이 부럽지 않게 될 것이다.
오직 우리가 할 수있는 것은 진실에 대한, 목마름을 견뎌야 하는 것이고, 때가 되어, 그 영혼의 목마름에
단 한 방울이라도 깨달음의 물방물이 입가를 스쳐 지나갈 때, 더 이상 물을 찾아 헤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만나서 진실의 눈을 마주하고 이것에 대해 나눌수 있을때 까지, 계속 전단지를
만들고 쓸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전단지는 물론이고, 세상의 어떤 광고 전단지의 말과 그림에도 속지말고 스스로
다가가서 맛보고 증명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