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근심
우리는 백년도 살지 못하면서 천년의 근심으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한탄하는 옛사람의 말이 있고, 외국에는 “Don’t worry be happy” . “하쿠나마타타”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행복의 조건은 일단 걱정이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과테말라에는 언제부터 시작됬는지 모를 걱정을 대신 해주는 걱정인형이 있고,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등 아시아에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일이나 액운등을 막아주고, 행운을 불러오는 “부적”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다니기도 한다.
불교에서도 근심하는 마음을 “번뇌”라고 하며, 초기불교의 경전에서 왜 그러한 걱정들이 생겨나는지, 현미경을 들여다 보듯 아주 자세하게 방대한 분량의 경전에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자비로운 가르침은 부처님의 말씀 이후, 여러 스님들의 자비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우리가 무조건 경전을 읽고 외운다고 근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배워서 익히는 습관이 익숙한 우리들이 진리에 관심을 갖고 쉽게 다가서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근심은 저절로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내가 어떻게 할 수없이 떠오르기 때문에 생각을 안하려고 다른 흥미로는 것을 찾는 것은 실시적으로 도움이 되지만,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 할 수없다.
그래서 근심의 실체를 바로 아는 깨달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고 적이 누군지 알 수없는 상황에서는 이기기는 커녕, 적의 조롱을 당하게 될 것이다.
중국의 손자병법에는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을 싸워도 모두 이길 것이다” 라는 말이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최대의 적은 바로 “나”이다.
그러므로 나를 알면, 적은 저절로 알아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적과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근심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평생을 두고 걱정을 하고 살고, 또 그것이 당연한 듯 반복한다.
신체적으로 우리 몸의 수명이 평균 백년 미만이라면, 그 만큼의 걱정만을 하고 사는 것이 합리적일 것인데, 천년을 걱정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과한 욕심이다.
예로 생의 후반부의 머리가 하얀 백발의 재벌들이 그들의 부를 상속하기 위해서, 전전긍긍하는 것과 같다.
대다수의 사람이 생각하는 행복의 지표가 돈과 명예에 국한되어 있는 탓이기도 하지만,
자기가 죽은 다음에도 돈과 명예에 집착한다면, 천년의 근심을 한다는 옛사람의 말이 과장 됐다고 할 수없는 일이다.
살아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걱정과 근심으로 보내는데, 이 심각한 병을 그냥 방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대다수라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없다.
더욱이 우리가 마음의 고통을 겪는 이유가 생각때문임을 인식하는 사람도 드물다.
우리가 하루 중에 잠자는 시간을 뺀 나머지의 시간 대부분을 걱정과 근심으로 보내는 것은 인생낭비이다.
“진정한 나”를 찾아야하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의학의 발전으로 백년을 조금 넘게 산다해도, 우리가 실제의 세상에서는 살아보지도 못한 채, 상상속에서 근심하고 가당치 않은 욕심만 부리다 갈수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