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보드
우리의 원래 마음은 마치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하지만 무엇이든 쓸 수있는, 화이트보드와도 같다.
하지만 그 화이트보드에는 테두리가 없기때문에 한계가 없이 광활해서, 우주까지도 그 화이트보드에 그려진 흔적에 지나지 않다.
옛 선사들은 그것을 가르켜 거울이라고 하기도 하고, 허공이라고 하기도 하고, 꿈과 같다고 하기도 했다.
마술연필이 마법을 부리려면, 무엇을 그리거나 쓸수있는 무언가가 필요하지만, 모두가그 연필이나, 그 연필이 그려내는 흔적을 주목할 뿐, 모든 흔적을 허용하는 그 바탕에는 관심을 주지않는다.
화이트보드에 부처를 그리면 부처가 보이고, 나를 그리면 내가 보이지만, 그 것들은 내가 그릴 수 있는 것들이지 진정한 나일 순 없다.
여기까지가, 내가 가르킬 수있는 한계에 이고, 여기서 대답할 수없는 답을 스스로 통한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나를 만나게 된다.
이렇게 바로 가르키지 못하는 것을 가르키는 것이, 부처님과 역대 선사들이 일관적으로 평생하신 일이다.
그 화이트보드에 나는 “부처가 아니야” 라고 쓰고 지우지 않는다면, 깨달음 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고, “나는 부처야” 라고 쓴다면 부처는 될 수있겠지만, 나 자신은 찾을 수없다.
우리는 이미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라는 배경에 무엇이든 쓸수있고, 그릴 수있지만, 화이트 보드를 깨끗이 지우지 않는 한, 그 흔적은 오래 갈 수 있지만, 영원할 수 없고 변하게 된다.
화이트보드 위에 흔적들은 수없이 오고 가고,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나의 감정, 느낌, 의식,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단 한가지, 그 것의 진실함에 통한다면, 그 화이트보드 위에 어떠한 그림이 펼쳐진다 해도, 빠져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을 것이다.
TV에 출연하신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중에, 나를 찾은 사람이나, TV에 출연한 사이비 교주의 말을 듣는 중에, 나를 찾은 사람이나, 다를 것이 전혀없다.
왜냐하면, 부처님이나 사이비 교주, 두 사람 모두 TV에 비춰진 그림에 불과 한 것이기 때문에, 더 나아가 TV조차도 모두 내마음에서 비춰진 것임을 문득 안다면, 무엇을 보든지, 또 무엇을 듣는다 해도, 이 일이 내 마음 하나의 것일 수 밖에 없음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설법은 화이트보드를 일관되게 가르키고, 사이비 교주의 설법은 한 인간인, 자기자신을 가리킬 것이기 때문에, 그의 설법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어렵다.
또 주의해야 할 것은, 부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 현혹되어 자신을 잃는다면, 오히려 사이비교주의 미로 보더 더 지독한 미로에 빠져 헤어나오기 힘든 상황에 빠진다.
부처님의 말씀일지라도 화이트보드 위에 계속 남아 있다면 그 문자에 현혹되기 쉽기때문이다.
그 가 화이트보드에 무언가를 쓸때는 어떤 말이나 어떤 그림을 그리더라도 힌트는 그 문장이나 그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화이트보드에 경전을 써서, 볼 수없는 이 하나의 진실를 들어냈고, 선사는 화이트보드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써서 부처님의 흔적을 지우는 동시에 부처님이 가르켰던 이 하나의 진실을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