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
본래, 우리의 삶에는 기준이 없던 것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 평생 구속된다.
왜냐하면, 기준이란 누군가가 정해놓은 것이기 때문이고, 그 누군가는 따로 없다,
다시말하면 아무도 내 삶을 간섭할 수 없다,
다만 떨어진 낙엽이 흐르는 강물을 따라가듯 자연히 흘러갈 뿐인데, 그 것을 참견하는 것은, 오직 “나”라는 생각, 즉, 흔히들 얘기하는, “에고”라는 것이다.
나는 “에고”란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에고”라는 단어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무언가 이미 존재한다고 믿는 동안은, 실제를 보고 소멸하는 순간까지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무엇을 해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당신이 해낸 일이 아닐 확률이 100%이다.
매일 반복되는 게임을 하듯, 우리의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스스로가 했다고 할 수없는데, 그 다음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것 없지 않은가?
우리의 일상을 엄밀히 말한다면 그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들을 오감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도 축구경기를 보듯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눈에 힘을 주고, 지켜보는 것이 아닌, 마치 어떤 전지전능한 신이 이 세상의 단편을 팝콘을 먹으며 관람하듯, 그냥 항상 여기에 있을 뿐이다.
그래도, 우리 스스로 만든 기준을 세워놓고 맞추며 살아 간다면, 마치 2층 버스의 2층 맨앞에 앉아, 자신이 운전하는 듯, 착각하며, 우연히 버스가 자신의 뜻대로 갈땐, 즐거워하고, 버스가 자신의 뜻대로 가지 않으면 자신 스스로를 반성하는 바보같은 짓을 하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의 의미는, 오직 자신 스스로가 누구인가 를 아는 것이고, 그 것을 바로 볼 때, 모든 것이 평등해지고, 사랑하는 것도, 사랑할 수 없었던 것도, 사랑하는 것 이다.
스스로의 일은 전혀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라고 믿는 에고를 위해, 혹은 자신의 가족을 위해, 좀 더 낫다는 사람은 혹은, 에고는 나라를 위해, 또는 이 지구를 위해, 자부심을 가지고 혹은 좌절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취지는 가상하지만, 흔한 얘기로,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타인도 사랑 할 수없다.” 라고 인생에서 좌절을 겪을 순간에만, 이 말을 되새기는가?
우리가 생각으로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보면 도와야겠다는 생각, 그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며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만약, “내가 내 목숨을 버리고, 남을 도와야지” 라고 생각한다면, 한치의 망설임없이, 나와는 상관없는 아이를 위해서, 달리는 차앞으로 몸을 던지겠는가?
우리 인생에서 때때로 만나는 살신성인들, 그들은 목숨이 소중하지 않아서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그 당시에는 나와 남이 없어서 내가 남을 돕는 다는 생각조차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내가 나, 스스로를 돕는데는 어떤 기준도 생각도 필요치 않다.
태초때 부터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하는 기준은 없다,
만약 그런것이 있다면 그 기준 안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세상에는 수 많은 부처님들이 있지만, 이런 부처라는 기준은 없다.
당신의 머리속에, 부처의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을 따르는 사람을 가장한 에고의 망상이다.
왜냐하면, 부처는 배울 수가 없는 것이고, 우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불교에 “보살”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말뜻은 “깨어난 중생” 이라는 뜻이다.
그 말의 본질은 바로 당신을 가리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