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배려
우리는 시간을 초월해 역대 부처님과 선지식들의 도움을 통해 깨달음의 힌트도 얻고 이 후의 방향을 잡아 살아간다.
이러한 도움에는 가리킴과 가르침, 무언과 유언이 있다, 선에서의 가르침은 지식을 주기위함이 아니며 오히려 그 말뜻과는 상관없이 소리를 통해 가리키려는 것이 있어서 스승의 소리를 통해 보아야하고 스승의 몸짓을 통해 들어야 한다.
또 말없음 즉, 무언을 드러내기 위해서 유언, 즉 말을 한 것 이기도 하다, 법을 가르켜 “벙어리가 꿈얘기 하는 것과 같다” 라는 옛 선사의 말이 있는데 이말은, 신령스런 꿈을 꾼 벙어리가 그 꿈을 설명하려는데 분명 무언가를 열심히 얘기하고 있지만,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법을 설하는 선사와 같다는 말이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얘기지만, 일상에서도 말은 하지않는 편이 하는 것보다 좋을 때가 더 많고, 또 우리나라 속담에 "백번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 라는 말도 있다.
말은 아무리 잘해도 오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직접 보는 것만 못하가 때문에 재판에서도 증거나 나오면 말로는 반박이 거의 불가능한 것과 같다.
“본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만국 공통으로 통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많은 스승님들의 배려로 자신의 말을 남기지 안음으로서 사후에 혼선을 남게 않게 하기위해 제자들이 법문을 받아 적지도 못하게 했던 것이고, 때론 스스로 벙어리가 되어 손짓, 발짓으로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설령 부처님이 나에게 직접와서 말로 설법을 해주는 것 보다, 바로 보여주는 것 이상 확실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년의 세월을 내려온 불경이나 조사의 어록은 먼저 자기 스스로를 확인한 후에 스승님이나 부처님의 경험을 참고용 또는 공감용으로 보는 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 내가 네팔, 카트만두에 있을 때 일이다, 나는 그 때 한 레스토랑에서 오랜세월 세계의 산악인들을 에베레스트로 안내했던 셰르파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가까운 산을 하이킹을 하고 내려온 젊은사람들의 무리가 꽤 큰소리로 방금 마치고 돌아온 산행의 무용담과 가이드 북을 펼쳐보며 내친김에 에베레스트도 가자며 허풍을 떨고 있었다.
진짜를 본 사람은 말이 없다, 세상에서 제일 높은 설산을 여러차례 다녀온 이유로 거의 모든 발가락을 동상으로 잃은 그는 미소만 띄울 뿐 아무말이 없었다.
선의 스승은 마치 셰르파와 같다, 그들은 모든 여정을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앞에 나서지 않지만 이미 산을 본 사람들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걸리버 여행기를 수만번을 읽었다 하더라도 한번 본 것에 비교할 수없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스승들이 “깨달음은 없다” 라고 하면서도 깨달음의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오해의 소지가 많아 분명히 밝혀 둘 것이 있다.
만약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그 환희를 깨달음이라고 했을 때, 그 기쁨의 차이는 사람의 따라 천차만별인 것이다.
만약 어떤 특정한 사람의 기쁨의 표현이 좋다 생각하고 그와 같은 기분만을 좇는다면, 불경에 나오는 수미산에 간다 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산 정상에서 첫경험의 환희는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과거가 될 것 이다,
그 산을 매일 오르거나, 지금 산 정상에 터를 잡고 사람에게는 지금 그런 것은 환희는 없다고 말할 수 도 있을 것이다.
